꼬꼬무 칼날위에서 노래하다 독립유공자 이육사 시인

2024. 3. 31. 12:00일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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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육사는 일제강점기의 어둠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저항의 목소리를 높인 인물입니다. 본명 이원록(또는 이원삼, 이활)에서 이육사로 이름을 바꾼 그는 윤동주, 한용운과 함께 가장 유명한 저항 시인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꼬꼬무 122회는 칼날위에서 노래하는 시인 이육사 편입니다

꼬꼬무 칼날위에서 노래하다

 

깊은 가문의 역사와 독립운동의 뿌리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며, 그의 친척 중에는 여러 독립유공자가 있어, 그의 가문은 오랜 역사와 함께 독립운동의 정신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1904년 경상북도 예안군(현재의 안동시 도산면)에서 태어난 이육사는,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라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습니다. 그의 조부, 이중직은 대한제국 시기 장릉 참봉을 지냈고, 이육사는 조부에게서 소학과 한학을 배웠습니다. 이 조부의 영향으로 이육사는 어린 시절부터 굳건한 학문적 기반을 다지게 되었고, 조부가 별세한 후에도 한학의 공부를 계속하여 그의 문학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꼬꼬무 이육사

독립운동과 옥고, 그리고 시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그의 호 '육사'가 탄생했습니다. 옥살이를 통해 그는 더욱 단단해지고,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출옥 후에는 다양한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근무하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까지 다양한 문학 활동을 펼쳤습니다.

굴하지 않는 의지와 문학을 통한 저항

이육사는 일제에 의한 한글 사용 탄압에 맞서 한시를 짓는 등의 방법으로 저항의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그의 시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와 애국심이 담겨 있으며, 그는 '저항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며, 수능 시험 등에서도 자주 출제되어 그의 문학적 가치가 인정받고 있습니다.

꼬꼬무 이육사 꺽이지 않는 마음

숭고한 희생과 기억의 중요성

이육사의 생애는 단순히 '저항시인'으로만 요약할 수 없는, 초인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감옥살이를 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조선 독립군의 무기 반입 계획에도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마흔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만 불타올랐습니다.

유산과 기념

이육사는 1990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습니다. 안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육사 문학관이 설립되었으며, 그의 시비와 기념공원도 조성되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안동 강변도로가 '이육사로'로 명명되고, 그의 대표작인 '광야'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것은 공공장소에서도 그의 유산을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며, 이는 이육사의 문학과 독립운동에 대한 공헌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우리 사회의 의지를 반영합니다.

 

이육사의 삶과 문학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서 현재에도 많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의 저항과 애국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도전과 고난 앞에서도 용기와 희망을 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의 문학은 개인의 고뇌와 사회적 정의, 그리고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시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함께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꼬꼬무 독립투사 이육사

 

첫 시 '말'과 필명 '이활'

1930년 1월 3일, 조선일보에 '말'이라는 제목의 시가 게재되었습니다. 이 시는 이육사(본명 이원록)가 '이활'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첫 작품입니다. 이육사는 이 시를 통해 독립운동가로서의 굳은 의지와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세상에 처음 알렸습니다.

강 건너간 노래[31]
이육사

섣달에도 보름께 달 밝은 밤
앞내강 쨍쨍 얼어 조이던 밤에
내가 부른 노래는 강 건너갔소

강 건너 하늘 끝에 사막도 닿은 곳
내 노래는 제비처럼 날아서 갔소

못 잊을 계집애 집조차 없다기에
가기는 갔지만 어린 날개 지치면
그만 어느 모래불[32]에 떨어져 타서 죽겠죠

사막은 끝없이 푸른 하늘이 덮여
눈물 먹은 별들이 조상 오는 밤

밤은 옛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한 가락을 여기 두고 또 한 가락 어디멘가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 건너갔소.

 



자야곡[33]
이육사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슬픔도 자랑도 집어삼키는 검은 꿈
파이프엔 조용히 타오르는 꽃불도 향기론데

연기는 돛대처럼 날려 항구에 들고
옛날의 들창마다 눈동자엔 짜운 소금이 저려

바람 불고 눈보라 치쟎으면 못살이라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그림자 발자취 소리

숨 막힐 마음속에 어데 강물이 흐르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맘에 들리라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
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절정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34][35]가 보다.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한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 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라는 필명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미에서 '戮史'를 사용했으나, 가족의 권유로 더 순화된 '陸史'(육지의 역사)로 변경했습니다. 나아가, 일제에 대한 조롱을 담아 '肉瀉'(고기 먹고 설사한다)라는 의미도 부여했습니다.

 

이육사의 남긴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큰 울림과 교훈을 전달합니다. 이육사의 삶을 통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되새기고, 불의에 대한 저항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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